음악을 들을 때 음악 외에도 환경이 감상에 영향을 주는 경우가 꽤 많습니다. 같은 노래라도 비 오는 날과 햇살이 화창한 날 듣는 느낌이 다르고요. 관심 없던 멜로디도 아늑한 식당에서 흘러 나올때 문득 귀를 사로잡기도 하지요. 제가 생각하는 음악을 듣는 환경 중 절대적인 요소 하나가 바로 조명인데요. 생생하게 생각나는 어린 시절 기억 중 하나도 실내조명에 관한 것입니다. 저녁 무렵 방안에서 책을 읽고 있으면 매번 아버지께서 '어두운 데서 책을 읽으면 눈 나빠진다'며 형광등을 켜고 나가셨거든요. 아마 많은 분들이 이런 경험을 하셨을 것이고 지금 자녀를 둔 분들도 '내 아이들의 눈이 나빠지지 않도록 방을 환하게 해 놓아야지' 라는 강박을 가진 분들도 많을 텐데요. 그런데 의외로 '어두운 곳에서 책을 읽는 것이 시력을 나쁘게한다라는 상식은 오해'라는 전문가들의 의견이 많습니다. 오히려 너무 밝은 조명이 시력에 안 좋은 영향을 준다고도 하지요.
사실 우리 도시의 밤거리는 너무 과도한 인공조명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마치 더 큰 음악소리를 내어 경쟁하는 낮 도심의 가게들처럼요. 밤이 되면 소리가 아니라 단지 빛으로 변주되어 또 다른 제2라운드가 시작하는 듯 하지요. 안타깝게도 이러한 우리의 조명 문화는 우리가 거주하고 휴식을 취하는 실내 공간에도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밤이 되면 방과 거실의 쨍쨍한 형광등이 도심의 집들을 수놓습니다. 마치 우리의 집이 대형마트나 병원도 아닌데 말이죠.
저는 결혼을 하고 딱 한 가지 아내에게 요구 사항이 있었습니다. 집에서 형광등을 절대 쓰지 말고 간접 조명만을 쓰자는 것이었지요. 그 정도로 실내조명은 저에게 중요한 삶의 요소이기도 한데요. 사실 근본적인 것은 형광등이냐 아니냐의 문제라기보다 실내조명에 대한 이분법적인 편견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밝다와 어둡다 이 두가지의 선택으로만 바라보지 않나요. 일상의 삶은 이와 달리 반복 속에서도 다양한 패턴을 가지고 있음에도 말이지요. 생활의 다양함에 따라 그에 따른 조명도 그 공간에 알맞게 관심이 필요합니다. 마치 우리가 사는 집은 가족들과의 일상과 휴식을 함께하는 곳이지 사무실이나 편의점이 아닌 것 처럼요.
요즘 해운대는 유독 저녁 날씨가 참 좋습니다. 밤이 되기전 저도 하나 둘씩 집안의 조명등을 켜기 시작하는데요. 그럴 때면 '모키(Mocky)'의 음악을 틀어 놓습니다. 그리고 음악의 온도에 따라 각방의 램프와 주방조명등을 적절히 맞추어 줍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여름 바람과 밤 공기냄새가 어찌나 싱그러운지요. 마치 모키의 음악이 집의 조명을 조율해 주는 조율사 같습니다. 모키는 캐나다 출신의 작곡가이자 프로듀서 그리고 보컬리스트 입니다. 그의 음악은 빈티지한 멋스러움을 갖고 있는데요. 그래서인지 흥겨운 리듬속에서도 아주 기분 좋은 고즈넉함을 선사해요. 특히 지난달 발매된 그의 신보 '키 체인지(Key Change)'는 이런 매력이 집약된 걸출한 앨범입니다. 여러분들도 이 여름밤 모키의 새 앨범에 맞추어 집의 조명들을 한번 바꾸어 보는 것은 어떠세요? 정말 멋진 여름밤이 될 거예요.
많은 사람이 아파트를 주거공간으로 가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아파트의 구조는 사실 똑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습니다. '그냥 아파트가 다 그렇지 뭐'라는 푸념으로 흘려버리기에는 삶에 너무 큰 부분을 놓치고 있는 것일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의 개성은 다양한데 삶의 가장 근본적인 공간이 다들 같은 형태를 가진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하거든요. 창의성이 강조되는 시대에 말이지요. 가격이 높은 아파트는 다르지 않겠냐며 일반적인 아파트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분도 주위에 많습니다. 그런데 돈과 주거공간의 획일화 문제는 분명 다른 듯 보입니다. 다른 나라 도시의 아파트들을 살펴보면 더욱 이러한 생각이 들어요. 어쩌면 이런 획일화가 주거공간마저 돈의 척도와 결부하는 편견을 갖게 한 것은 아닐까요.
우리 도시의 안타까운 모습에 조금은 서글퍼지기도 하네요. 저는 삶의 일차적 공간의 획일화는 분명 사고의 틀을 자유롭게 하는 데 많은 불편을 준다고 믿습니다. 다만 우리 삶에서 피부로 느끼기 어려울 뿐이겠지요.
그래서일까요. 최근 집이나 주거공간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꽤 진행되는 것 같습니다. 자신에게 맞는 공간의 쓰임새나 스타일을 만들기 위해 시간을 투자하는 분들을 주위에서 종종 접할 수 있습니다. TV나 매체 등에서 인기리에 다루어지는 가족에 대한 예능이나 스타들의 집들이 공개되면서 이러한 욕구들이 점점 자연스럽게 다가오는데 한몫을 하기도 했고요.
저 역시 새 앨범이나 프로젝트를 들어갈 때면 주거 공간을 그 앨범을 준비하는데 맞도록 짜임새를 바꾸는데 오랜 시간을 투자하는 편입니다. 집을 방문해 보면 정말 그 사람의 실제 모습이 잘 드러나기도 한다는데요. 재미있는 것은 인테리어를 누군가에게 맡긴 집은 항상 표시가 난다는 것입니다. 반면 하나 하나 자신이 시간을 들이고 고민을 해서 아이템들을 마련한 집은 신기하게도 단번에 그것을 느낄 수가 있는데요.
아무리 고가의 집과 훌륭한 디자이너의 인테리어도 애정을 가지고 직접 꾸며 나가는 집의 개성과 아늑함을 나오게 할 수는 없는 듯 합니다.
주거공간의 꾸밈이 주인의 삶과 닮아 있을 때, 아이템들이 화려한 미사여구 없이 실제 삶에 직접 기능할 때 비로소 빛이 나는 듯 합니다.
아일랜드 출신의 뮤지션 비요크(Bjork)의 음악을 들을 때면 항상 이런 집을 방문한 듯 합니다. 집 주인이 오랫동안 애정있게 집의 짜임새를 가꾸고 바꾸어 나가며 담백한 멋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집 말이죠. 그래서 군더더기 없이 모든 집의 아이템들이 일상적인 삶에 직접 기능하는 것으로 채워져 있는 그런 공간들이요.
현존하는 여성 팝 아티스트 중 장르와 지역을 불문하고 단 한 사람을 꼽으라면 많은 분이 비요크를 꼽으실 거예요. 물론 저도 마찬가지인데요.
오랜 활동기간에도 불구하고 항상 새로움과 트렌드를 잃지 않되 고유 색깔을 지키는 것, 강한 개성과 스타일이 빛을 발하되 아늑함과 자연스러움을 느낄 수 있는 것! 이 두 가지는 비요크의 가장 큰 음악적 매력입니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의 음악을 통해 그녀의 음악과 그 음악을 듣는 팬들이 같이 사는 가상의 멋진 집을 꾸며나가는 것은 아닐까요. 올해 초에 발매된 비요크 새 앨범 'Vulnicura'에서도 이러한 그녀 집의 멋스러운 변화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푸디토리움의 음반가게] 144. 감성을 전달하는 가장 창조적인 사운드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
우수에 빠져들게 했던 독특한 사운드의 향연
▲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 음반 표지. 김정범 제공
우리는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음악을 들을 때 사운드가 좋다 나쁘다 등의 표현을 종종 합니다. 전문적인 의미를 위해서는 더 많은 설명이 필요하겠지만 우리는 보통 사운드를 음향이나 소리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데요. 우리가 쉽게 접하고 사용하는 말이면서도 일반 사람들이 다가서기 조금은 어려운 전문적인 음악용어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보통 사람들에게 어떤 음악이 좋아지거나 반대로 자신의 취향이 아니라고 판단되는 요인들 중 음악 자체의 사운드를 꼽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습니다. 실제로 음반 관련업에 종사하시는 분들조차도 이것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 경우도 꽤 많습니다. 일반 청중은 음악의 소리자체가 어떻게 다르게 들리는지 인식하기 어려울 뿐더러 음악을 만드는 뮤지션들만이 집착하는 분야로만 생각을 하는 경우이지요.
그런데 사실은 우리는 곡의 멜로디나 리듬을 느끼고 반응하는 만큼 그 음악이 가진 사운드에 대해서도 아주 활발하게 반응합니다. 다만 그것이 어떤 것이다라고 말로 정확하게 정의하거나 리듬이나 멜로디처럼 흥얼거릴 수 없을 뿐이지요.
사람들의 음악적 취향이 다양해지고 세부적인 하위 쟝르들에 대한 관심 역시 높아지면서 특히 음악의 개성 있는 사운드는 음악이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습니다.
음반을 만들면서 자신의 곡을 그 스타일에 맞게 레코딩하고 사운드를 창조하는 과정은 대중음악에서 멜로디를 만들고 가사를 쓰는 것 만큼 아주 중요한 과정입니다.
저는 이런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항상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를 예로 들고는 합니다. 영국 출신의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는 팝 음악에 관심있는 분들이라면 세대를 막론하고 누구나 아실 만한 팝의 역사적인 그룹입니다.
프로듀서, 작곡 작사가이자 엔지니어인 알란 파슨스와 에릭 울프슨, 이 두 사람이 만들어 1975년 활동을 시작하면서 수많은 명곡을 탄생시키지요.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타임'이나 '올드앤와이즈' 같은 우수에 젖은 독특한 서정적인 트랙들은 중고등학교 시절 저를 그들의 음악에 무척이나 빠져들게 했습니다.
세월이 지나 제가 처음 뉴욕에 도착을 때입니다. 처음 보는 타임스퀘어의 휘황찬란함에 정신없이 길을 걷고 있는데 클럽에서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의 공연이 있다는 전단이 단번에 눈에 들어오더군요. 세상에나!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의 라이브를 이렇게 실제로 볼 수 있다니. 정말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습니다.
그날 밤의 모든 일정을 접고 저는 표를 구매해서 그들의 공연을 보러갔습니다 그리고 제가 너무 좋아하는 곡들을 불러주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렸지요.
그런데 공연은 제 기대를 너무 무너뜨렸습니다. 클럽 내의 록 음악 사운드로 연주되는 그들의 곡들은 앨범과 똑같은 멜로디와 편곡의 음악들이었지만 그 감흥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세월이 지나고 여러 다른 상황이 있었겠지만 같은 곡들이 그 사운드에 따라 얼마나 다른 정서로 다가올 수 있나를 뼈저리게 체험했지요. 물론 그만큼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 앨범의 사운드가 그들의 음악과 가사를 얼마나 창의적이고 개성있게 표현해 준 멋진 작품들이었는지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www.pudditorium.com
제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 중 하나가 노포(老鋪)라는 말입니다. 노포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보통 오래된 상점이나 가게를 의미하는데요. 개인적으로 각 지역의 오래된 가게들에 관심이 아주 많기도 하고, 이 어감이 주는 알 수 없는 푸근함이 저는 참 좋습니다. 매스컴의 영향인지 요즘에는 사람들 사이에서 노포하면 일반적으로 오랜 전통과 역사가 있는 식당을 지칭하기도 합니다. 사실 제가 부산에 사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도 부산 노포 식당들의 매력 푹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요즘 이런 노포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국내의 노포들이 대부분 사라졌거나 아직 존재한다고 해도 안타깝게 그 빛이 이미 바랜 경우 역시 많습니다. 이 소중한 우리의 노포들이 지금 시대에도 새롭게 빛을 발하며 계속 공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누에보 탱고 앙상블(Nuevo Tango Ensamble)의 음악을 들을 때면 마치 이런 바람이 음악을 통해 잠시나마 이루어지는 듯한 위안을 받습니다. 누에보 탱고 앙상블은 1999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이탈리아의 탱고 밴드입니다. 피아노와 리더를 맡은 파스쿠알레 스테파노(Pasquale Stefano)를 중심으로 반도네온과 베이스 등 3개의 악기로 구성된 트리오 형태의 연주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사실 피아졸라로 대변되는 현대의 탱고를 연주하는 뮤지션들은 지금 이 시대에도 세계 각지에 셀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그만큼 탱고가 현대에 탄생된 음악 장르 중 빼놓을 수 없는 중요 장르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피아졸라의 작품들이 그의 사후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끼칠만큼 넘어설 수 없는 위대한 영역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일반적으로 대중에게 탱고는 곧 대부분 피아졸라의 음악들이다라는 하나의 공식처럼 다가오기도 하지요.
누에보 탱고 앙상블이 다른 수많은 탱고 연주 그룹과 다른 것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이들의 음악은 현대의 탱고 음악이 가진 개성들을 유지하고 완벽하게 재연하면서 이들만의 새로운 오리지널 스코어들을 만들어 나갑니다. 그리고 이들의 탁월한 연주 테크닉과 작·편곡 능력은 이 시대에 작곡된 새 탱고음악들이 이렇게 또한 아름다울 수도 있구나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저 역시 이들의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무척이나 놀랐고 단번에 팬이 되어 버렸는데요. 얼마전 제가 맡았던 영화 허삼관의 사운드트랙에 참여를 직접 부탁하기도 했을 정도이지요. 허삼관 영화를 보신 분들 중 꽤 많은 분들이 탱고 음악 또한 인상적이었다는 얘기를 자주 듣는데요. 사실 이 탱고들은 제가 곡을 쓰고 누에보 탱고 앙상블이 직접 편곡하고 연주하여 이탈리아에서 레코딩한 음악들입니다.
오늘 음반가게에서는 그들의 앨범 중 2011년작 'd'impulso'를 추천해드리고 싶습니다. 특히 앨범 수록곡 중 'Le Lantern Di Phuket' 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트랙이예요. 마치 지금 이 시대에도 고유의 빛을 잃지 않고 여전히 건강한 모습을 가진 노포 식당을 발견 했을 때의 기쁨이라면 적절한 비유일까요. 이 음악과 앨범을 듣노라면 이러한 기쁨이 매번 떠오르네요. www.pudditorium.com 김정범 뮤지션
'당신의 음반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다가갔으면 좋겠는가?' 이 질문은 인터뷰 때도 그리고 평소 스스로에게도 자주 묻는 질문 중 하나입니다. 푸디토리움 홈페이지의 예전 저의 글 중 다음 앨범에 관한 글을 쓰면서'제 음반이 누군가에게 항상 기다려지는 음악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바람을 남긴 적이 있는데요. 그러고 보면 요즘처럼 유행과 소비의 변화가 빠르고 음악 역시도 하나의 소비품처럼 여겨지는 시대에 새 음반을 기다린다는 것 만큼 그 아티스트에 대한 더 큰 찬사가 있을까요. 올해 7월말 발매 예정인 리앤 라 하바스(Lianne La Havas)의 새 앨범 '블러드(Blood)'는 저에게 바로 그런 기다림의 앨범입니다. 속된 말로 정말 오랜만에 목이 빠지게 기다리는 앨범이지요. 리앤 라 하바스는 영국 런던 출신의 여성 싱어송라이터입니다. 그리고 많은 악기들을 능숙하게 다루는 재능 넘치는 아티스트에요. 얼마 전 저는 우연히 그녀의 신보 중 선공개되었던 '언스토퍼블(Unstoppable)' 뮤직 비디오를 보고 점점 끌리던 그녀의 매력에 이제는 완전히 빠져버리게 되었습니다.
리앤 라 하바스는 2012년 데뷔 앨범 '이즈 유어 러브 빅 이너프?(Is Your Love Big Enough?)' 단 한 장을 내놓은 신인 아티스트입니다. 그리고 이제 두 번째 새 앨범의 발매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지요. 그러나 저는 그녀의 데뷔 앨범을 접했을 때 '에리카 바두'의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의 충격을 느꼈습니다. 비록 단 한 장의 앨범이지만 독보적인 여성 작곡가이자 보컬리스트로의 반열에 들어서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던데요. 데뷔 앨범이 2012년 아이튠즈 올해의 앨범을 수상하고 그녀가 2014년 팝의 거장 프린스(Prince)의 앨범에 참여하며 함께 무대에 섰던 것은 분명 단순한 행운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녀의 가장 큰 매력은 여지껏 듣지 못했던 개성입니다. 그녀의 목소리만 얼핏 듣자면 단순한 알엔비와 소울 장르의 음악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곧 이 목소리가 마치 진한 에스프레소의 달콤한 쓴맛처럼 다가오기 시작하지요. 그러고는 결국에는 이 향기가 포크, 자메이칸, 락, 재즈, 팝 발라드 등 정체를 알 수 없을 정도의 다양한 장르와 섞이기 시작하면서 아주 깊고 매혹적인 향취를 만들어 냅니다.
곧 발매될 '블러드' 앨범 중 현재 단 한 곡 '언스토퍼블' 만이 공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모든 곡들은 아직 베일에 가려져 있어요. 하지만 '언스토퍼블' 이 한 곡만으로도 그녀의 놀랍도록 성장한 모습이 보입니다. 제가 들은 최근 몇 년 사이의 해외 팝 중 이토록 높은 완성도와 강한 개성이 조화를 이룬 곡은 없었던 듯 한데요. 묵직한 비트와 촘촘하게 수놓아진 리듬 사이로 흐르는 그녀의 보컬은 정말 이 곡에서 단연 독보적입니다.
이 두 번째 앨범으로 리앤 라 하바스는 재능 있는 신인에서 자신 만의 영역을 확고히 가진 여성 아티스트로서의 면모를 본격적으로 드러내게 되지 않을까 예상을 해봅니다. 여름을 맞이하는 이 시기에 그녀의 앨범과 함께할 기대감에 저도 한껏 마음이 부풀어 오르네요. www.pudditorium.com
[푸디토리움의 음반가게] 141. 지역과 장르를 넘나드는 영화음악의 품격 알렉상드르 데스플라
유럽 색채 입힌 클래식한 할리우드 영화음악
▲ 2010년 영화 '킹스 스피치'의 OST 앨범 표지. 김정범 제공
웨스 앤더슨 감독의 작품은 나오면 무조건 본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만큼 저는 열혈 팬 중 한 사람입니다. 2014년 그의 연출작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국내 개봉되었을 때 역시도 잔뜩 기대를 안고 극장을 찾았습니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웨스 앤더슨의 연출 능력에 다시 한번 감탄을 하게 되더군요. 영화를 보는 내내 이 훌륭한 연출에 대해 궁금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음악을 누가 만들었는지 특히 더 궁금해졌습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이렇게 영화 음악을 잘 만들었지? 하는 생각이 영화를 보는 내내 끊이질 않았거든요.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디트를 보고서야 음악감독이 누군지 알게 되었고 저도 모르게 '역시 드디어 그가 이렇게 빛을 발하는구나' 하는 감탄사가 나오더군요. 바로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였습니다. 그리고 2015년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결국 음악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알렉상드르 데스플라는 우리에게 다소 생소한 영화음악 감독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현재 세계에서 소위 가장 '핫(hot)'한 영화음악 감독을 한 명 꼽으라면 저는 단연코 그를 꼽을 겁니다. 1961년 파리 출생인 그는 프랑스 영화음악 작곡가로 활동했지만 최근 수년간 할리우드 블럭 버스터물의 상당량을 작업했습니다. 2016년 개봉예정인 스타워즈를 비롯해 해리포터와 죽음의 성물, 뉴문, 고질라 등 역시 그의 작품입니다.
그의 특징은 마니아층이 두꺼운 작가들의 작품과 상업적인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등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것인데요. 그러면서도 특유의 음악적 개성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 정말 놀랍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라벨과 드뷔시 등의 작품과 함께 재즈와 월드뮤직 등을 즐기며 자랐다고 하는데요. 이런 그의 유년기는 후에 브라질과 아프리카 음악에 대한 공부와 함께 그의 클래식적인 바탕을 더욱 풍부하게 해주었다고 합니다.
이런 그의 취향과 백그라운드는 그의 작품들에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마치 한창 학생 때 시네마테크에서 즐겨 보던 유럽영화 특유의 멜로디와 이와 아주 대조적인 할리우드 영화 음악이 한데 어울려 있는 느낌이랄까요.
그의 음악이 제 귀에 쏙 들어오게 된 계기는 2010년 영화 '킹스 스피치'였습니다. 이 사운드 트랙 중 동명의 메인 테마 킹스 스피치는 단순 반복되는 피아노 반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들려오는 오른손의 주 멜로디도 피아노를 어느 정도 배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합니다. 그러나 오케스트라가 뒤에서 서서히 들려오고 이 단순한 모티브들이 점차 변주되기 시작하면서 정말 독특하고 너무나 아름다운 멜로디로 변모합니다. 특히 이 영화의 사운드 트랙에서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의 음악 전반에서 드러나는 미니멀리즘은 절정을 이룹니다.
그의 음악을 듣노라면 오늘날의 현대의 클래식 작곡이 영화 음악에서 어떻게 호흡할 수 있는지 그 모범을 제시하는 듯한데요. 그래서인지 요즘의 저에게도 한창 많은 생각을 하게끔 하는 앨범이네요.
뉴욕의 첼시는 클럽과 갤러리 그리고 멋진 레스토랑들이 즐비한 제가 아주 좋아하는 동네 중 한 곳입니다. 도로 위 화물 노선을 산책로로 개조한 하이라인 덕에 맨해튼의 아침을 산책하기에도 더할 나위 없지요. 그런데 얼마전 부터 이 동네를 산책 할 때면 독특한 호텔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고 해요. 바로 27번가에 위치한 '매킷트릭(Mckittrick) 호텔'입니다.
허름하고 거대한 폐건물을 연상시키는 이 건물은 소문에 의하면 1939년 뉴욕 최상의 고급 호텔로 지어졌다고 하는데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호텔이 정식으로 문을 열기 6주전 2차대전의 발발로 개장을 하지 못했답니다. 이렇게 문이 닫힌 채 몇 십 년이 지난 최근까지 사람들에게 전혀 공개되지 않았는데 얼마전 이곳이 드디어 문을 열었다고 하더군요.
영화에나 나올법한 다소 괴이한 소문에 저도 작년 여름 이곳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여태껏 제가 경험하지 못한 정말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슬립 노 모어(Sleep No More)'라는 공연을 이 곳에서 직접 체험하게 된 것이지요. 이쯤 되면 짐작하셨을 분도 있을 텐데요. 매킷트릭 호텔은 사실 이 공연장의 이름입니다. 소개된 공연의 자료와는 달리 첼시지역 3개의 공장을 연결해 만든 거대한 공연장입니다.
내부는 실제 호텔처럼 만들어져 있습니다. 복도가 있고 옛 영화에서나 등장하는 엘리베이터가 실제로 가동중이며 연회장도 존재합니다. 이 공연의 가장 큰 특징은 무대와 객석이 없다는 것인데요. 관객들 각자가 직접 호텔을 이동하며 체험하는 인터랙티브형태의 작품입니다. 관객들은 똑같은 가면을 쓴 채로 서로를 알아 볼 수 없으며 이로 인해 이 작품에서 하나의 미장센으로서 역할을 하기까지 합니다.
가면을 쓰지 않은 배우들의 연기는 관객들의 눈 앞에서 실제 사건처럼 벌어지지요. 이 호텔에서 일어난 미스터리한 사건을 쫓기 위해 관객들은 끊임없이 각층을 쉴 새 없이 이동합니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맥베스(Macbeth)'를 재해석한 이 작품은 어떠한 대사도 없습니다. 연기와 매킷트릭 호텔이라는 거대한 미쟝센 그리고 오직 음악과 사운드로 모든 극이 이끌어집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이 이미지와 사운드로만의 연결로 재탄생된다면 바로 이런 형태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베니 굿맨의 '문글로', 글렌 밀러의 '유 스텝드 아웃 오브 어 드림', 테드 루이스의 '온 더 사이드 온 더 서니 스트리트' 등 듣는 순간 행복감과 낭만에 젖게 되는 재즈 넘버들은 이 기괴한 사건들의 주요 사운드트랙으로 울려퍼집니다. 곁들여진 페기 리의 '이즈 댓 올 데어 이즈' 부터 잭 부케넌의 노래까지 시대를 풍미했던 팝과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 영화 '현기증'과 '사이코'의 사운드트랙은 관객들로 하여금 공연의 순간들을 삶의 가장 아찔하고도 낭만적인 악몽의 세계로 이끕니다.
연출자 펠릭스 바렛과 맥신 도일은 어느 날 옛 누아르 필름의 사운드트랙을 듣다 순간적 영감을 얻어 이 작품을 집필했다고 하는데요. 이런 즉각적이고 충동적인 음악의 쓰임은 지금까지 제가 본 공연 중 최고의 OST라고 할 만큼 눈물나도록 아름답습니다. 아쉽게도 이 OST는 아직까지 발매가 되지 않고 있지만 이 비밀스러운 이 호텔만큼이나 이 OST들도 영원히 베일에 싸여 있는 것이 더 멋지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