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73세인 아르토 노라스를 송영훈이 처음 만난 것은 30년 전쯤, 그러니까 지금의 송영훈의 나이쯤이었다. 긴 시간 그를 동경하며 밟아왔던 연주자의 길. 이제는 그 시절 스승과 닮은 모습으로 세계를 누비는 그에게 있어서 스승과 함께하는 연주는 아무래도 남다를 수 밖에 없다.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 아르토 노라스가 한국에서 독주회를 가졌던 것은 송영훈의 나이 9세 때였다. 당시 아르토 노라스는 음악학도들을 대상으로 공개 레슨을 했었는데 어린 송영훈도 거장의 가르침을 함께 받고 싶어 이에 참관하였다.
젊은 시절의 아르토 노라스
노라스는 레슨을 할 때 본인의 연주를 많이 들려주는 타입이었는데, 그의 연주는 어린 송영훈의 마음마저 사로잡을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인상적인 첫 만남 이후 그는 아르토 노라스의 팬이 되었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던 청소년 송영훈은 16세 때 다시 한 번 노라스를 만날 수 있었다. 아르토 노라스가 창시한 핀란드의 난탈리 국제음악제의 아카데미에 학생으로 초대받게 된 것이다. 당시 故 야노스 슈타커 등이 마스터클래스를 열었고 그는 당연히 노라스 선생님의 클래스에 참가하였다. 이제는 스승의 모습과 닮은 모습으로 성장한 그가 같은 음악제에서 학생들을 위해 마스터클래스를 갖고 있으니 첼리스트 송영훈이 가야 할 길에 스승이 좋은 지침이 되었다는 것은 두 말 할 나위도 없다.
아르토 노라스의 팬이 된 송영훈은 자라면서 연주와 후학 양성을 위해 세계 이 곳 저 곳을 바삐 누비는 스승을 따라 스위스, 프랑스, 핀란드, 한국 등지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송영훈이 20대였을 당시 유럽 이 곳 저 곳에서는 예비 대가만 모아서 펼치는 작은 페스티벌이 많았는데 그는 이런 페스티벌들에서도 노라스를 따라다녔다. 그러나 그 때까지만 해도 직접적으로 가르침을 받은 적은 없었다.
송영훈이 아르토 노라스의 가르침을 처음으로 직접 받았던 것은 25살 즈음. 13명 정도의 소수 정원만 뽑으며 혹독하기로 유명한 프랑스의 모 아카데미에 그의 친구인 스위스의 명 첼리스트 요엘 마로시와 함께 참가하게 되었을 때였다. 당시 요요마가 그들을 가르치게 되어 있었지만 사정이 있어 오지 못하고 어떤 운명인지 아르토 노라스가 그 자리를 대신 하게 되었다. 송영훈은 그 때 한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연주자였고 세종 솔로이스츠와 금호 사중주단으로 활동하며 승승장구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노라스는 그의 연주를 듣고 점심을 함께 먹자며 그를 따로 불렀다.
“연주가 너무 편안하군요.”
조용히 입을 뗀 노라스의 가르침은 날카로웠다.
지금까지 너무 편안한 삶을 산 것이 아니냐며 연주에 담긴 인생에 대해 지적한 노라스의 말은 송영훈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랬다. 서울시향과 랄로 협주곡으로 데뷔한 이래로 원하든 원치 않든 사람들은 그에게 늘 최고라는 칭호를 붙였다. 어릴 땐 철이 없어 첼로를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연주했고 커서는 최고라는 수식어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 그의 삶을 아르토 노라스는 연주만으로 캐치하였고 그를 일깨우기 위해 뼈아플테지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송영훈은 이후 한국에서의 소위 잘 나가던 생활을 모조리 접고 그 길로 아르토 노라스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핀란드로 떠나 늦깎이 학생으로 시벨리우스 음악원에 들어갔다. 그 곳에서는 소수 정예로 뽑힌 4~5명의 학생들만 가르치고 있었다. 항상 어두침침하고 구름 낀 우울한 나라. 아는 이 하나 없고 늘상 날씨가 궂은 이 곳에서 그는 스승과 지옥 훈련을 하며 1주일에 콘체르토를 하나씩 마스터하며 연습에 연습을 반복했다.
“스승님의 연주에 대한 가르침 자체도 감사하지만 그런 지적을 해주실 수 있었던 점이 가장 감사한 점이에요.”
송영훈은 이제 본인 앞에 거장이란 말이 붙기 시작한 나이가 됐음에도 스승의 고마움을 잊지 못한다. 가장 어려움을 모를 시기에 자신의 마음을 다잡아주었던 스승은 이제는 그의 음악적 동료가 되었다. 함께 페스티벌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새로운 세대를 키워가고 있는 그들은 이제 음악적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다. 그만큼 아르토 노라스는 송영훈을 크게 성장시킨 셈이다. 이제 그들은 어깨를 나란히 두고 함께 무대에 선다. 아마도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한 번의 보잉만으로도 서로가 무엇을 표현하고 싶은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닮은 모습으로 다시 만나는 사제의 첼로 콘체르토 속에서 우리는 특별한 애정과 보은의 마음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스톰프뮤직 에세이 / 스톰프뮤직 아티스트들의 음악 활동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연재합니다. 도전을 멈추지 않는 스톰프뮤직 소속 아티스트들의 음악과 삶! 그 동안 기억 속에 담겨 있던 이야기들을 꺼내봅니다.
제 1화. 첼리스트 송영훈의 탱고 스토리
클래식의 본고장 유럽으로 떠나라
미국 유학 시절, 송영훈의 스승 채닝 로빈스는 세상을 떠나기 전, 그만을 위한 유언장을 마련하였다. 11세라는 어린 나이에 서울시립교향악단 협연으로 데뷔한 이후 미국 유학 시절까지 단 한 번의 좌절 없이 정상의 자리를 지키던 송영훈. 그가 믿고 의지했던 스승님이 세상을 떠난 이후, 유언장에 적힌 대로 짐을 싸서 곧장 영국으로 떠났다. 그 때 그는 스무 살이 갓 넘은 나이였다.
영국에 건너가 제 2의 인생을 시작을 한 송영훈은 지금은 사라진 영국의 첼로 페스티벌에서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세계적인 첼리스트들의 연주를 하루 종일 들으며 지금껏 만나 보지 못했던 첼로의 울림에 큰 충격을 받았다. 무릎을 꿇었다. ‘스타’로 스포트라이트만을 받던 그의 삶에 온 첫 좌절이었다. 그 때부터 그는 골방에 틀어박혀 원하는 소리를 얻을 때까지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도 모른 채 연습에 매달렸다. 하루 종일 연습했는데 한 마디를 채 나가지 못한 적도 많았다. 연습하다 수업에 가지 못한 날이 더 많을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한국에서 걸려 온 전화 한 통.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연습을 멈추지 않았다.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새벽까지 연습에 몰두하다 잠시 거리로 나왔는데 비가 와서 촉촉해진 길에 울려 퍼지던 라디오의 낯선 음악에 그만 눈물이 터졌다. 가슴 속 깊이 응어리진 무언가가 터져 나오는 기분이 들었다. 한참을 울다 동이 텄고, 그는 곧바로 BBC 라디오에 전화를 걸었다. 그 곡은 바로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아디오스 노니노(Adios Nonino)’. 피아졸라가 세상을 떠난 그의 아버지를 기리며 만든 곡이었다.
가장 좋아하는 음악을 나눠라, 그게 너의 사명이다
그렇게 피아졸라의 존재를 알게 된 그는 마음 속에 곡을 새기고 다시 클래식 연주 활동에 몰입했다. 솔리스트로서 영국 체임버 오케스트라와 하이든 콘체르토 협연 실황을 녹음하였으며 뉴욕 체임버 오케스트라, 필라델피아 체임버 오케스트라, 타피올라 체임버 오케스트라, 앙상블 가나자와, 헬싱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핀란드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 도미니칸 내셔널 오케스트라, 요미우리 도쿄 심포니, 북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야나첵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뉴저지 심포니 오케스트라 등의 세계 유수 오케스트라와 협연하였다.
세계적인 첼리스트로 자리매김을 한 그는 2005년 우연한 제안을 받게 된다. 바로 일본 최고의 탱고밴드 쿠아트로시엔토스의 내한 공연에 함께 해달라는 제안. 조금의 고민도 없이 제안을 수락한 그는 스승님의 유언을 다시금 떠올렸다. “가장 좋아하는 음악을 나눠라, 그게 너의 사명이다.” 쿠아트로시엔토스와의 탱고 공연으로 마음 속에 담아 두었던 탱고의 기억을 끄집어낸 그는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탱고를 레퍼토리로 첫 번째 앨범을 만들었다. 클래식 아티스트의 행보로 보기엔 너무나 파격적이었지만 좋은 음악을 나누고자 하는 마음을 사명으로 생각했기에 멈추지 않았다. 이후로도 탱고를 향한 그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피아졸라 밴드의 마지막 피아니스트, 파블로 징어와의 만남
찰스 워즈워스와 함께 미국을 돌며 공연을 하다 만난 클라리네티스트 호세 프랑크 바예스테르. 워낙 탱고에 대한 열정이 높았던 그는 스페인 출신의 연주자를 만나 탱고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투어 기간 동안 호세가 피아졸라 밴드의 마지막 피아니스트였던 파블로 징어의 집에 머물고 있음을 알게 된다. 투어를 마치고 곧장 뉴욕으로 달려간 송영훈은 와인 한 병과 첼로, 그리고 본인의 탱고 앨범을 들고 파블로 징어의 집을 찾았다. 누구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송영훈이 탱고 연주자로 적합한지를 판단하는 비공식 오디션이었다. 파블로 징어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내리 4-5시간을 연주했다. 즉흥 연주가 자유롭지 않은 클래식 연주자였기에 더 어려웠던 시간이었다고 한다. 연주를 마치자마자 파블로 징어는 그의 탱고 앨범을 요청했고, 한 시간을 꼬박 처음부터 끝까지 들었다. “I like you.” 보너스트랙까지 모든 트랙을 듣고 나서 던진 파블로 징어의 한 마디. 그렇게 그는 탱고 연주자로서의 기량을 인정 받고, 파블로 징어, 호세 프랑크 바예스테르와 함께 독창적인 탱고 레퍼토리를 만들게 된다.
멈추지 않는 도전,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아티스트
2009년, 파블로 징어, 호세 프랑크 바예스테르와 함께 [오리지널 탱고]라는 타이틀로 한국에서 공연을 마치고 미국으로 건너가 [PIAZZOLLA MASTERWORKS] 앨범 녹음을 진행한다. 피아노와 편곡을 맡은 파블로 징어는 “피아졸라가 살아서 우리 셋을 보았다면, 이 새로움에 기뻐했을 것이다” 라고 음악적 자신감을 보이기도 했다. 피아노와 첼로, 클라리넷으로 선보이는 누에보탱고를 혁신적으로 재편성한 세 사람은 이듬해에도 한국에서 공연을 진행, [A Latin American Journey] 라는 타이틀로 아르헨티나, 쿠바, 브라질의 잘 알려진 탱고 음악부터 도미니카, 우루과이까지 남미 음악의 세계를 확장하였다. 또한 [송영훈의 4 첼리스트]라는 이름으로 네 대의 첼로로 전하는 캐주얼한 클래식 공연을 기획, 송영훈의 대표 브랜드 공연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정통 클래식부터 캐주얼한 포맷, 그리고 탱고로 대표되는 남미 음악까지 그의 도전은 멈추지 않았다. 정상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계속해서 도전했다.
최근에는 일본에서의 활동 영역을 넓히며 아시아 활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그는 가나자와 앙상블과 하이든 협주곡 C장조를 협연하였으며 도쿄 산토리홀에서 뉴재팬 필하모닉과의 드보르작 협연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일본의 민영방송 아사히 TV에서는 ‘daimeinonai ongakukai(다이메이노나이 온가쿠카이)’라는 프로그램에 체코 야나첵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을 일본 전역에 방송하기도 하였다. 또한 2013년부터 매해 일본 현지에서 리사이틀 투어를 갖고 있으며 마에스트로 정명훈이 이끄는 아시안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각지에서 성공적인 협연 무대를 가졌다.
연주 활동 이외에도 ’클래식 알리기’에 앞장서고 있는 그는 예술의전당 인기 기획 프로그램인 ‘11시 콘서트]를 진행하며 대중들과 가까이 소통하기도 하였다. SK텔레콤과 함께하는 문화나눔 프로젝트 [해피 뮤직스쿨]의 음악감독을 맡으며 클래식 음악교육을 접하기 힘든 청소년들에게 음악을 통한 나눔을 실천하며 사회 공헌활동에도 적극 힘써왔다. 2012년부터 현재까지 경희대학교 음대 관현악과 교수로서 후학양성에도 힘쓰고 있으며 매주 주말 아침 KBS 1FM [송영훈의 가정음악]을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