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보도2016. 5. 12.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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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스트라는 여러 리더들의 손길로 돌아간다. 지휘자가 오케스트라 전체의 소리를 한 방향으로 이끈다면, 수석들은 지휘자 리드에 맞춰 각 악기 파트 소리를 책임지는 막대한 임무를 맡는다. 연주 때 지휘자와 제일 가까운 맨 앞자리에 앉아 객석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이들이 수석이다. 악단 사운드와 정체성을 구성하는 뼈대인 만큼 전통 있는 악단일수록 선발 기준이 몹시 까다롭다. 최근 콧대 높은 유럽 오케스트라들에서 한국인 수석들의 활약이 대단하다. 수차례 치열한 공개오디션에서 실력만으로 클래식 본고장 유럽 출신 경쟁자들을 제치고 자리를 따낸 당찬 젊은이들이다. 오케스트라 단원 모두의 마음을 사는 완벽한 후보가 나타날 때까지 몇 년이고 공석으로 비워두는 자리라 더욱 의미가 깊다. 

◆ 독보적 개성과 존재감으로 인정…현지 극성 팬까지 거느려 

독일 베를린방송교향악단 바순 수석으로 활약 중인 유성권(28)은 2009년 스물한 살 나이에 70대1의 경쟁률을 뚫고 수석 자리에 올라 화제를 낳은 인물이다. 당시 악단 전 파트를 통틀어 최연소였다. 그는 수석 입단 반년 후 단원들에게 인정을 받고 종신 단원이 됐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폴란드 출신 거장 마레크 야놉스키가 실력과 개성으로 인정한 몇 안 되는 주자다. 지난달 29일 서초동 예술의전당 근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입단 후 몇 년간은 수석으로서 지휘자와 악단에 빨리 적응해야 한다는 부담이 컸지만 이제 7년차가 되면서 여유가 생긴 것 같다"고 했다. 

유성권이 현지에서도 이례적일 만큼 어린 나이에 권위 있는 수석 자리를 꿰찬 배경에는 그만의 독보적인 연주력과 존재감이 작용했다. 그는 "오케스트라 곡마다 바순 비중이 크지만 나머지 악기에 상대적으로 묻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경향을 바꾸고 싶었다. 그래서 공연 때마다 바순 소리가 제대로 돋보이도록 솔리스트적인 면을 특히 강조하고 연주 움직임도 크게 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일찌감치 그의 역량을 파악한 야놉스키는 요즘도 종종 연주 후 그에게 "잘 뽑은 것 같다"고 말을 건넨다. 바순 비중이 컸던 지난 시즌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공연 뒤엔 유성권만 네 번 일으켜 세워 박수를 받게 했다. 그는 공연 때마다 케이크를 구워주고 명품 볼펜을 사주는 현지 '극성 팬'들을 거느린 유일한 단원이기도 하다. 

그의 활약상은 피아노나 바이올린·첼로 등 현악기에 비해 국내 연주자들 기량이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평을 들어온 관악 파트에서 이뤄낸 쾌거다. 유성권 외에도 호른 연주자 김홍박은 노르웨이 오슬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호른 제2수석으로, 플루티스트 조성현은 2015~2016시즌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 플루트 수석으로 무대를 빛냈다. 유성권은 "관악 분야가 피아노·현악에 비해 시기가 조금 늦었을 뿐 외국에서 공부한 뛰어난 선생님이 늘고 조기 유학을 떠난 연주자도 많아져서 앞으로 비상할 것"이라고 평했다. 그 역시 예원학교와 서울예고를 거쳐 17세부터 베를린국립음대에서 공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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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력만으로 만장일치 발탁 

최근 네덜란드에서도 낭보가 들려왔다. 로열 콘세르트허바우와 함께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악단인 로테르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첼로 수석으로 한국의 임희영(30)이 선정됐다는 소식이 지난 2월 전해졌다. 첼로 수석은 첼로와 더블베이스 파트를 사실상 총괄해야 하는 데다 객석에서도 가장 눈에 잘 띄는 중요한 자리다. 지난 1일 예술의전당에서 만난 임희영은 "유럽 오케스트라가 그런 자리에 키도 작고 나이도 어린 동양 여성 연주자를 뽑아줄 가능성이 적을 거라 생각하고 부담 없이 봤는데 정말 꿈만 같다"고 말했다. 

그는 국적·성별 등 편견을 제거하기 위한 블라인드 테스트를 수차례 거친 뒤 로테르담필 수석지휘자인 야닉 네제-세갱과 단원들 앞에서 연주해 전 단원 만장일치 합격을 이끌어냈다. 그 역시 유성권과 마찬가지로 전 단원 중 가장 나이가 어리다. 

이른 나이부터 국내에서 뛰어난 스승들에게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뒤 클래식 본고장인 유럽에서 하드 트레이닝을 거치며 연주력을 갈고닦은 게 성공 비결이다. 예원학교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첼리스트 정명화와 양성원을 사사한 그는 스승(양성원)의 스승인 첼리스트 필리프 뮐러가 있는 프랑스 파리국립고등음악원에 수석 입학한 뒤 2년간 공부했다. 그는 "처음에 불어를 못해 힘들었지만 이때 정말 많은 걸 배웠다"며 당시 함께 공부한 동료 브루노 델레플레어는 현재 베를린 필 첼로 수석으로 활약 중이라는 얘기도 전했다. 그는 로테르담 필 수석으로 임명된 것이 "10개 콩쿠르에서 우승하는 것보다 기분이 훨씬 좋다"고 웃으며 덧붙였다. 박제성 음악평론가는 "한국인 현악기 연주자가 유수 악단 수석으로 임명되는 것은 여느 콩쿠르에서 입상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고, 해당 악단 정체성과 색깔에 제대로 동화돼야 하기에 더욱 그렇다"며 "조기 유학과 체계적인 교육의 공이 크다"고 평했다. 

임희영은 오는 6월 서울 예술의전당 청소년음악회를 통해 본격적인 한국 무대 데뷔에 나선다. 


[오신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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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톰프뮤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