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보도2015. 11. 23. 13:57

[출처] http://news20.busan.com/controller/newsController.jsp?newsId=20151119000007


[푸디토리움의 음반가게] 162.조용하지만 또렷하고 묵직한 발걸음 미셸 엔디지오첼로

음악으로 승화한 긴 삶의 여정



우리 사회에서 '나이가 든다'는 말은 상당히 많은 의미를 내포합니다. 단순하게는 아이가 어른이 되는 것처럼 신체적인 노화나 변화를 의미하기도 하는데요. 나이가 든다는 여러 의미 중 하나는 자신의 의지로 변화 가능한 영역을 사회적인 삶에서 명확하게 알아가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자신의 의지로 절대 변화시킬 수 없는 삶의 영역이 무엇인지를 더 또렷하게 알아가는 것이겠지요. 현실을 직시한다는 것은 이 두 영역의 분리와 경계를 더욱 잘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살아간다는 것'을 더 잘 알게 되면서도 한편으로 좌절이나 실망의 씁쓸함이 혀끝에서 맴돌기도 하겠지요. 
 
미셸 엔디지오첼로(Meshell Ndegeocello)의 음반을 듣고 있노라면 오랜 삶의 직시 속에서 조용하지만 묵직하게 걸어가는 한 예술가의 걸음이 느껴집니다. 게다가 그 발소리는 무척이나 또렷하고 명확합니다. '삶을 정면으로 응시하다'는 표현은 정말이지 미셸 엔디지오첼로의 음악을 가장 잘 설명해줄 수 있는 문구가 아닐까 하는데요. 그녀는 1968년 베를린 출생의 미국 여성 음악가예요. 작곡가이자 보컬리스트이면서 훌륭한 베이스 연주자이자 래퍼기도 하지요. 리듬앤블루스, 힙합과 레게, 록 등 전 장르가 버무려진 음악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앨범마다 확연히 다른 색깔과 변화를 끊임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녀의 음악은 팝 음악계에 광범위한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심지어 네오 소울의 태동에 본격적인 불을 지핀 장본인이라는 얘기도 듣고 있지요. 양성애자로서의 커밍아웃과 유명 페미니스트 작가와의 열애 등이 그녀의 가십거리로 아직 등장하지만, 그녀의 진가는 오직 음악 속에서 빛을 발합니다. 입이 떡 벌어질 만큼의 기술로 베이스를 연주하며 동시에 노래하던 그녀의 데뷔 모습은 미국 팝 역사상 가장 독특한 여성 음악가 캐릭터의 등장을 보여줍니다. 동시에 여성 싱어송라이터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관념을 완전히 뒤흔드는 계기가 되었지요. 

팝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아주 중대한 지점에 미셸 엔디지오첼로가 항상 존재합니다. 오늘은 그녀의 세 번째 앨범인 1999년 작 '비터(Bitter)'를 여러분과 같이 듣고 싶은데요. 어제는 전화로 제 넋두리를 듣던 아내가 진해에서 한 장의 사진을 보내줬습니다. 여좌동의 개천을 가방을 멘 채 걷고 있는 두 여자아이의 사진이었어요. 여좌천은 제가 아주 좋아하는 곳이자 세상에서 가장 멋진 벚꽃을 볼 수 있는 곳입니다. 비 온 뒤 손을 호호 불며 추워하면서도 한 걸음씩 긴 개천을 걷는 두 여자아이가 무척 인상 깊었네요.

오랜 발걸음 끝의 길 마지막에는 희망이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이미 그만큼 걸어왔고 또 계속 걸어가고 있기에 자신의 가치와 위안을 충분히 가져도 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희망과 성공은 길 끝 어딘가에도 존재하지 않는 신기루가 아니라 우리의 모습 그 자체일는지도 모릅니다. 마치 어제 사진 속의 두 아이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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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범
  
 
뮤지션

Posted by 스톰프뮤직